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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닝ː

나는 마라토너다



나는 마라토너다. 그리고 나는 마라톤을 사랑한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꼬박 30여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이젠 누구보다도 마라톤을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한다.


방황의 세월

다시 돌이켜봐도 내 마라톤 인생은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나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늘 후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걸 보면….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련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 당시 고교 랭킹 1위였기 때문에 어디든 진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난 실업팀에 입단해야 했다. 결국, 원하지 않았던 실업팀 입단은 2년 만에 팀을 이적하게 되는 결과로 돌아왔다. 그렇게 시작된 팀 이적은 그 이후로도 다섯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특히 1997년 11월에는 IMF로 인하여 소속팀이 해체되는 아픔도 겪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마라톤에 대한 열정이 별로 없었다. 시련이 계속될수록 마라톤에 대한 싫증만 더해가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팀이 해체되면서 더 이상 마라톤을 계속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어쩌면 무의미한 달리기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대책도, 일말의 고민도 없이 무조건 운동화를 벗어 던졌다. 미래에 대한 뚜렷한 목표도, 방향도 설정하지 못한 채 방황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이 너무 편하고 좋았다. 새벽에 일찍 일어날 일도, 억지로 뛰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었다. 밤늦게까지 술집을 전전해도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았다. 어느새 내가 마라톤 선수라는 사실조차 점점 잊혀지고 있는 듯했다. 가끔은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듯한 허무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무기력한 생활이 계속될수록 방황의 늪만 점점 깊어져 가고 있을 뿐 마라톤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마라톤 중계방송을 보게 되었다. 가슴이 설레었다. 42.195km 내내 TV 브라운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늘 보아오던 낯익은 화면에서 느껴지는 묘한 감정. 잊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잠재의식 속에 아직 마라톤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걸까? 그동안 마라톤 중계방송을 수없이 봐왔지만, 그날의 묘한 감정만큼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까? 친구들을 만나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40대로 보이는 한 중년 남성이 운동장을 열심히 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의식중에 내 발걸음은 멈춰 섰고, 그렇게 한참이 지나도록 운동장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운동장을 달리고 또 달렸다. 30분쯤 지났을까? 달리기를 끝내고 내 옆을 지나가는 그의 행복한 표정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순간 내 모습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무런 계획도, 아무런 목표도,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나 자신이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 없었다.


구세주를 만나다.

처음으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이대로 젊음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뭔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나는 계획조차 세울 수 없었다.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비참함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지난 20여년 동안 달리기 외에는 특별히 해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마라톤을 했던 것만큼만 노력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일 뿐이었다. 결국, 이의수의 인생에서 마라톤을 빼고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무렵 아내와의 만남이 있었다. 마라토너 방선희! 동아 마라톤과 조선일보 춘천 마라톤을 제패했던 그녀는 미모(?)를 겸비한 훌륭한 선수였다. 지금은 아마추어 러너들에게 ‘방 카리스마’로 통하고 있는 그녀가 바로 내 아내다.

그녀와 난 평소 그렇게 친하지 않았던, 막연한 친구 사이였다. 아니 좀더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녀와 난 거의 앙숙이었다. 한때는 같은 팀에서 2년 가까이 한솥밥을 먹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는 특별한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없었다. 그러던 그녀와 지금은 한집에서 살고 있으니…, 인연이긴 인연인가 보다.

그렇게 평소에 연락도 한번 없이 지내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미운 정이라도 들었던 걸까? 그녀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야기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음을 느꼈다. 확고한 신념과 자신에 찬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그녀의 모습에 새로운 감정이 느껴졌다. 내 운명을 그녀에게 맡겨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그녀에게 용기를 내어 프러포즈를 했다. 긴장한 내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가 던진 한마디. “너, 참 용감하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인연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아마 그녀가 없었더라면 나에게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라톤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도 별다른 내색 없이 내 생활을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모습이 답답하게 보였던지 이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선 마라톤을 다시 시작할 것을 권유했다. 솔직히 나는 다시 달려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끈질긴 설득에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깊이 처박아 놓았던 운동화를 꺼내들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동안 달려왔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실전과 이론 겸비한 마라토너

다음날 아침부터 새로운 달리기가 시작됐다. 30분이나 달렸을까?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은 달릴 수가 없었다. 나태한 생활의 연속이었던 내게 다시 달리기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겨우 30분을 뛰고도 내가 정말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기를 몇 개월.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은 점점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달리기가 점점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된 달리기는 내 삶에 많은 활력을 주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고나 할까? 처음으로 달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마라톤을 통해 삶에 활력을 되찾은 내게 그녀는 또 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그것은 바로 “실전과 이론을 겸비한 마라토너가 돼라”는 것이었다. 당시 난 대학을 중퇴한 상태였으므로 우선 학업을 계속할 것을 당부했다. 항상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지만, 선뜻 시작하지 못했던 내게 크나큰 자극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대학 입학을 위해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합격의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특기생이 아닌 일반 학생으로 입학했기 때문에 학업과 마라톤을 병행할 수 없었다. 정말 난감했다. 마라톤을 포기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렵게 입학한 학교를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일단 한번 부딪혀 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예상은 했지만, 학업과 운동을 병행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운동만 할 때는 소속팀에서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운동 외에는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내겐 정말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다.

지도자는커녕 당장 먹고살 집도 없었다. 친구, 후배, 친척집 등을 전전하며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지만, 차 안에서 새우잠을 자며 학교 식당을 이용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다 보니 학업도, 운동도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뭔가 확실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되는 절실한 상황이었다. 가장 시급한 부분이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선 조그만 원룸을 얻어 생활의 안정부터 찾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활의 터전이 되어줄 조그마한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진 않았다. 특기생이 아니었으므로 대학 생활에도 충실해야 했고, 마라토너로서의 신분을 지키기 위해선 운동도 열심히 해야만 했다. 마라톤을 시작한 이후로 학업과는 거의 담을 쌓고 살았기 때문에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지만, 하루 종일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달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몇 배 이상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각오로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학교 생활도 열심히 했고, 아무리 힘들어도 운동만큼은 거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수업이 늦게 끝나는 날에는 어두운 밤길을 달린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식사 준비에서부터 학업, 운동에 이르기까지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학생으로서 그리고 마라토너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가려고 항상 노력했다.


다시 태어나다

이런 노력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그녀는 나에게 항상 힘이 되어 주었다.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큰 용기를 주었고, 때로는 게으름을 피우는 내게 따끔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고, 따끔한 충고와 채찍질은 나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별 관심 없이 지켜보던 교수님들도 어느새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항상 격려해 주셨다. 아마 교수님들의 특별한 배려가 없었더라면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데 많은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교수님들의 관심과 배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면을 빌려 중앙대학교 체육교육학과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렇게 홀로서기를 하는 3년여 동안 난 네 번의 풀코스와 두 번의 하프 마라톤에 출전했다. 첫 출전은 1999 동아 마라톤대회. 결과는 2시간17분44초의 기록으로 6위. 성적만을 놓고 보면 대수롭지 않은 결과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돌봐주는 사람 없이 외롭게 대회를 준비했던 난 스스로 만족감을 느꼈다. 두 번째로 출전했던 조선일보 마라톤대회에서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가 나왔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이젠 엘리트 선수도 마라톤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훈련할 수 있는 여건은 여의치 않았지만, 항상 즐겁게 달리려고 노력했다. 때로는 고통이 엄습해 오더라도 그 고통마저 즐기려고 노력했다. 마음을 비우고 나니 달리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그래서일까? 다음 해에 출전한 2000 동아 국제마라톤대회에서는 2시간15분55초로 국내 3위를 했다. 많은 사람들은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누가 봐도 당연한 결과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난 마음속으로 환호했다. 기록이야 어떻든 난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훈련했는지… 또, 혼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나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선수들처럼 정상적인 팀에서 제대로 훈련했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난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아직 엘리트 선수들은 달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혼자서 마라톤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더더욱 모를 것이다. 마라톤은 달리기 그 자체를 즐기지 않으면 절대 혼자서는 쉽게 할 수 없는 운동이다. 나도 예전에는 마라톤을 고통스럽고 힘든 운동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라톤만큼 즐겁고 행복한 운동은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말이 있다. 이 작은 생각의 차이는 마라톤에 대한 내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이젠 후배들에게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즐거운 마음으로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목표가 반드시 현실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라고.

난 최고의 마라토너는 아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마라톤을 사랑하고 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마라토너! 아름다운 마라토너! 행복한 마라토너! 난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


소중한 시간들

혼자 훈련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긴 했지만, 3년이란 세월은 나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마라톤을 이해하기 위해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경험을 하려고 노력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가 있었지만,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성공의 이면에 감추어진 실패까지도 나에겐 큰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의 훈련 방법을 통해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마라톤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때로는 혼자 달려야만 하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난 나 자신을 더욱더 채찍질했다. 나태함이 느껴질 때마다 스스로를 질책하기도 했고, 힘들다고 느껴질 때는 더 즐겁게 달리려고 노력했다.

자신에게 가장 이상적인 훈련량과 훈련 방법을 터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난 훈련일지만큼은 꾸준히 쓰려고 노력했다. 훈련일지를 쓰다보면 그동안 내가 어떻게 훈련해 왔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훈련을 계획할 때도 좋은 참고서가 된다. 특히 모든 것을 혼자 계획하고 실천해야 하는 내게 훈련일지는 항상 좋은 길잡이가 돼주었다.

혼자 훈련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내 마음대로 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다양한 훈련 방법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몇 날 며칠을 탈진할 정도로 달리기도 했고, 달리고 싶지 않을 때는 한동안 달리기를 멈추기도 했다. ‘달리고 싶을 때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린다’는 내 마라톤 철학 중의 하나다. 결코, 억지로 달리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달리려고 노력했다.

사생활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도 혼자 훈련하는 내겐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내가 마라톤 선수라는 사실만은 항상 잊지 않았다. 철저한 자기 관리는 마라톤 선수에겐 생명과도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 대회 준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컨디션 조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영양 관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혼자 훈련하는 동안 늘 고민이었다. 처음에는 막막하기도 했지만, 좋은 기회로 만들고 싶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나만의 노하우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론적인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론적인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은 경험은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라톤은 분명 이론적인 지식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운동은 아니다. 또한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이론과 실기를 동시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스포츠 학자들과 현장에서 활동하는 경기인들 사이에는 인식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론과 실기를 적용시키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선수 출신이 학문을 연구하여 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관리와 지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다.

난 대회가 끝나면 한동안은 달리지 않는다. 모든 것을 철저히 잊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찾아 마음껏 즐긴다. 선수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자세일지 모르겠지만, 난 내 방식대로 마라톤을 즐기고 싶었다. 아무리 즐겁게 달린다 해도 대회를 준비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게 마련이다. 난 그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기 위해 달콤한 휴식과 함께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 마음껏 즐겼다.

나에겐 휴식도 훈련의 연장이다. 휴식이 포함되지 않은 훈련은 무의미한 것이다. 쉴 수 있을 때 과감하게 쉬는 것도 잘 달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휴식이라도 스스로 정해놓은 원칙만큼은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했다. 이것 또한 내 마라톤 철학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행복한 마라토너!!

지금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마라톤은 분명 내 인생에 있어서 고마운 존재다. 가끔은 좀더 노력하지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난 마라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많은 팀을 옮겨다녔다. 많은 팀을 오가면서 때로는 힘든 과정도 겪어야 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덕분에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많은 지도자를 만남으로써 다양한 훈련 방법을 경험했고, 또 많은 변화와 시련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 한때는 한곳에 정착하여 꾸준히 노력하지 못한 내 처지를 비관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시련들이 나를 더욱더 성숙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엘리트 집단인 국군체육부대에서 감독도 하고 있지, 항상 꿈꿔온 KBS 마라톤 해설위원도 하고 있지, 백석문화대학에서 겸임교수도 하고 있지, 부족하지만 포커스마라톤에 칼럼도 쓰고 있지,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도 준비하고 있지…. 그때의 그런 시련들이 없었더라면 아마 꿈도 꾸지 못했을 일들이며, 이 모든 것이 마라톤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2시간13분22초. 내 마라톤 기록이다. 보잘것없는 기록이지만, 난 내 기록에 만족한다. 솔직히 한때는 내 기록에 대해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누가 봐도 좋은 기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 기록을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이야기하고 다닌다. 2시간13분은 분명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고마운 기록이다. 나 자신도 이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뒤늦게라도 이 사실을 깨닫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한때 한국 마라톤을 주름잡던 많은 마라토너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난 그들과 똑같은 마라토너가 되고 싶진 않다. 비록 13분대 기록이지만, 많은 러너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마라토너로 남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마라톤은 분명 고통스럽고 힘든 운동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운동이다. 마라톤은 우리 국민의 정서를 대표하는 스포츠의 꽃이다. 내가 이런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다. 난 정말 행복한 마라토너가 되고 싶다. 그리고 달리기를 사랑하고 즐기는 많은 러너들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라토너가 되고 싶다. 내가 이런 사실을 좀더 일찍 깨달았다면 아마 지금보다도 더 훌륭한 마라토너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 내가 좀더 훌륭한 마라토너가 됐더라면 지금의 이런 행복은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난 지금 행복하다. 비록 최고의 마라토너가 되지 못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마라토너가 되고 싶은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 꿈을 위해 오늘도 난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마라톤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글: 이의수 전 마라톤 국가대표)
       2001 전국체육대회 마라톤 우승·최우수선수. <서브-3, 마라토너의 꿈> 출간. 현재 국군체육부대(상무) 마라톤 감독, KBS 마라톤 해설위원,
       천안 백석대학 레저스포츠학부 겸임교수.
(출처: 포커스마라톤 2006.05.09 21:45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