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긁기ː

번외편 : 프랑스 축구의 사회학



축구문화사] 번외편 : 프랑스 축구의 사회학

2010.07.02.금요일

필독

 

 

 

0.

 

1998년 월드컵 우승국이자 2006년 대회의 준우승팀 프랑스가 남아공에서 1무 2패로 추락했다. 뭐 충분히 충격적이지만, 더 충격적인 일은 프랑스라는 국가의 태도일 것이다. 다들 뉴스를 통해 알고들 계시겠지만, 프랑스 국회는 대표팀 감독인 레이몽 도메네크를 소환해 청문회를 열었다. 프랑스축구협회장도 도메네크와 함께 끌려왔으며, 프랑스 국회의원들은 두 사람을 죄인처럼 추궁했다. 장관 등 행정부 수반들까지 나서 도메네크를 짓밟고 있다. 그런가 하면 명선수 티에리 앙리는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지금은 청문회중...
 

스포츠일 뿐이지 않은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프랑스의 국민성에 이 정도의 관대함도 없단 말인가? 유럽의 깡패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사람들이야, 국제대회에서 죽을 쑤고 온 자국 대표팀 선수들에게 썩은 토마토를 던질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국회라니.

 

토마토 투척은 실망한 대중의 행동이다. 국가적, 공공적 차원의 일이 아니다. 국가를 운영하는 공적 집단이 스포츠대회에서 벌어진 망신살을 가지고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독재국가가 아닌 한 벌어지기 힘들다. 당연히 예상된 일이지만, 피파는 축구와 정치를 구분하지 않으면 향후 국제대회에서 프랑스 대표팀이 불이익을 볼 것임을 시사했다. 프랑스 정부의 입장도 뻔하다. 이번 일은 프랑스 내부의 문제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거다(재미난 것은 피파는 프랑스에서 탄생하고 프랑스에 있는 조직이라는 사실.).

 

헌데 "프랑스 사람들 너무 심하네."하고 넘어가기엔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생각해보자. 당시 전 대회 우승국이었던 프랑스는 졸전을 거듭한 끝에 이번처럼 조별예선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대표팀 선수들과 감독이 지금처럼 극단적인 대접을 받지는 않았다.

 

 

1.

 

1998년 프랑스월드컵. 결승전에서 개최국 프랑스가 세계 최강의 브라질을 3-0으로 대파하며 우승컵을 들어올리자 프랑스는 이상열기에 빠져들었다. 경기장에 나타나 평소답지 않게 두 팔을 치켜들고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을 과장하는 쇼를 연출한 시라크 대통령은 ‘역겹다’는 욕을 무수히 얻어먹었지만 지지율을 70%까지 끌어올렸다. 프랑스 증시는 무려 40%가 상승했으며 실업률이 감소했다. 한마디로 프랑스라는 국가 전체의 승리였다.

 

영웅 지단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픈 우리의 시라크


프랑스는 유럽에서는 특이하게도,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프랑스인이 가장 열광하는 스포츠는 F-1이다. 시민혁명의 나라답게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인 기질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1998년의 기현상이 연출된 이유는 뭘까. 프랑스에서는 축구가 정치적인, 때로는 사상적인 성격마저도 띠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의 영광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2.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얼마 전 썼던 기사의 내용 일부를 그대로 가져와본다.)

4년 전이었다. 한국과 프랑스의 조별예선경기를 앞두고 우리의 쭝앙일보는 '조직력으로 프랑스를 무너뜨릴 것'을 주문하며 이렇게 썼다.

 

"프랑스 대표팀은 ‘외인부대’ 성격이다. 23명 중 16명이 프랑스령이나 아프리카 이민자 출신이거나 이민 2세로 대부분의 선수가 프랑스 국가를 부르지도 못한다.  ... 중략 ...  프랑스 대표팀에 유색인종 선수가 많은 것은 전력 강화차원에서 이뤄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프랑스 대표팀은 미셸 플라티니가 활약하던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순수 프랑스 선수들이 주축을 이뤘다. 그러나 점차 전력이 떨어지면서 해외 프랑스령이나 아프리카 이민자 중 실력이 뛰어난 유망주를 발굴해 대표팀을 구성한 것이다."

 

그러면서 프랑스 대표팀을 가리켜 "모래알 조직력"이라는 표현을 썼다. 나는 다른 언론사의 지면을 통해 이 기사를 깠다. 일단 순수 프랑스인이라는 혈통은 없다. 프랑스인은 혼혈인종이다. 남미의 메스티조(백인+인디오)보다 혼혈역사가 길 뿐이다. 그리고 미셸 플라티니는 인종만 백인일 뿐 이탈리아 출신이다.

 

기사의 내용은 국내 독자들에게는 통할만했다. 한국에서 축구는 민족적이고,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단일민족적’이다. 그래도 조직력이 모래알이라는 발상은 너무 심했다. 각국의 용병들이 모인 클럽팀도 훈련을 거쳐 고도의 팀워크를 이룬다. 전 대회 우승국인 프랑스 대표팀이 초등학교 축구부원들도 아니고, 출신국이 다르다는 이유로 조직력이 허술할 거라는 논리는 소설에 가깝다.  


프랑스 대표팀에 유럽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피부가 검은 선수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수가 프랑스 국가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앙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표팀 선수들이 시합 전에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따라 부르지 않은 것은 너무 감정이 격양돼 시합을 망칠까 두려워서였다. 이 노래의 선정적인 가사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 … 피 묻은 깃발이 올랐다 … 들판에서 울리는 소리가 들리느냐 / 이 잔인한 군인들의 포효가 / 그들이 바로 우리 곁에 왔다 / 너희 조국, 너희 아이들의 / 목을 따기 위해서 …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 나가자, 나가자! / 저들의 더러운 피로 / 우리의 목마른 밭이랑을 가득 채우자.>

 

그러나 국가인 만큼 가사에 흥분을 하려면, 일단 애국심이 있어야 한다. 모든 국가가 다 상징적이겠지만, ‘라 마르세예즈’의 의미는 사뭇 남다르다.

 

2002년 5월, 생드니에서 열린 프랑스컵 결승전에서 시합 전에 ‘라 마르세예즈’가 연주되는 동안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지자 경기를 참관하던 시라크 대통령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노, 경기를 중단시키고 양 팀 선수들을 라커룸으로 돌려보냈다. 시합은 곧 재개되었지만 이 때 시라크는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을 했다.

 

“프랑스가 모욕받았다.”

 

모욕 받은 것은 국가(國歌)가 아니라 국가(國家) 자체였던 것이다. 대체 ‘라 마르세예즈’가 지키려고 하는 국가적 가치란 무엇일까? 시민혁명 당시 혁명군들이 부르던 노래인 만큼, 시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즉 ‘자유, 평등, 박애’의 개념에서 말이다. 프랑스 삼색기의 빨강, 하양, 파랑도 이 세 개념을 상징하는 색이다.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하던 홍세화 선생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똘레랑스’, 즉 사회 구성원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인내하는 태도는 박애에 해당할 것이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자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관대한 나라였다. 사르코지의 우파정권이 들어서면서 많이 퇴보했지만 말이다.

 

한편 평등을 상징하는 것은 프랑스의 교육환경이다. 프랑스는 외국인들과 이들의 2세들에게 관용뿐만 아니라 질 높고 값싼(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교육까지 제공한다. 여기엔 축구유소년 양성도 해당된다. 축구를 가르치는 프랑스의 체육관에는 스포츠를 통한 신분상승을 꿈꾸는 외국계 노동자의 어린 2세들이 넘쳐난다.

 

티에리 앙리는 모로코의 베르베르족(베르베르는 ‘고귀한 종족’을 뜻한다.)의 후손이다. 파리의 빈민가 출신인 앙리의 별명은 티티(TiTi). ‘파리의 불량소년’을 뜻하는 말이다. 축구를 하지 않았다면 유명한 갱스터가 되었을 거라는 평가를 받는 앙리가 세계적인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사회가 그에게 최고의 시설과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티에리 앙리
 

프랑스의 대표적인 유소년 축구 아카데미로는 국립기관인 CTN(내셔널 트레이닝 센터), 끌레이누 퐁테이누 등이 있다. 앙리와 니콜라 아넬카(이번 조별예선에서 도메네크 감독과 불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는 CTN 출신이다. 이곳은 12~14세의 아이들에게 2시간으로 지정된 기초 훈련 코스를 하루에 2번씩이나 제공한다. 물론 특정 클럽에 속하지 않고 훈련을 하는 선수들도 있다.

 

프랑스의 유소년 프로그램은 축구 이외에 학업에도 힘을 불어넣고 있다. 축구를 그만 뒀을 경우에 방황하는 일이 없도록, 또 해외 무대에 진출했을 때 관습, 문화, 언어의 차이에 당황하지 않도록 하는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드니 고부와 같이 대학 수험 자격을 취득한 선수도 종종 볼 수 있다. 기숙사 비를 포함한 이 모든 비용은 국가가 부담한다.

 

이렇게 성장한 선수들로 구성된 프랑스의 청소년대표팀은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하다. 프랑스의 성인 이하 대표팀은 세계무대에서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했다. 구타와 기합이 난무하는 군대식 교육은 훌륭한 시설과 지원을 이길 수 없다.

 

 

3.

 

유소년 팀에서 자라난 선수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에 경험을 쌓기 위해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의 2부, 3부 리그로 임대되어 프로 무대에 빨리 적응한다. 이것이 프랑스 축구의 일반적인 방책이다. 그러다보니 프랑스는 해외로 싱싱한 프로축구 초년생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다.

 

프랑스에서 제조된 질 좋은 원석에 대한 수요는 매우 높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 A, 독일 분데스리가의 팀으로 계속 수출되고 있다. 한편 유럽무대를 꿈꾸는 아프리카 선수들이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리는 곳이 바로 리게1(프랑스리그)다. 프랑스는 축구가 오가는 항구다. 피파를 창설한 나라답다.

 

역시 유소년 교육을 통해 세계 최고의 선수로 성장한 알제리 산악부족민의 아들 지네딘 지단은 다음과 같은 말로 어린 시절의 가난을 회상한 바 있다.

 

“근처에 상가가 있었다. 끊임없이 트럭들이 오가는 매우 활기찬 곳이었다. 어른들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짐을 옮겼다. 그에 대한 대가로 카라멜이나 돈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축구 외에는 그런 일만 하고 있었다.”

 

지브릴 시세는 코트디부아르 사람의 아들이다. 패트릭 비에라는 세네갈, 말루다는 프랑스령 기니, 마켈렐레는 콩고 민주 공화국 출신이다. 중남미 출신으로는 과달로프가 고향인 릴리앙 튀랑과 아르헨티나 이민 2세인 다비드 트레제게도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었던 주장 디디에르 데샹과 비센테 리자라쥐는 둘 다 스페인의 바스크족 출신이다.

 

이들은 출신은 다르지만 모두 프랑스인이며, 프랑스적 사회의 혜택을 받아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강력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외국계 유망주들이 성인이 되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 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 때부터다.

 

프랑스의 대표팀은 유색인 선수들을 '긁어모아서' 만든 팀이 아니다.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들은 스타의 위치에서 프랑스로 오지 않았다. 반대로 프랑스라는 환경이 이들을 스타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것이 프랑스 축구만의 독특한 힘이며 프랑스의 자랑거리다. 대표팀 선수들은 용병이 아니라 애국심 넘치는 시민이다.

 

따라서 프랑스에 있어 ‘레 블뢰(푸른색이라는 뜻으로, 프랑스 대표팀의 애칭이다.)’는 단순한 국가대표팀이 아니다. 프랑스 사회의 진보적 장점이 집약된 집단이다. 축구에서 이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원초적인 폭력성을 자극하는 축구는 우경화, 민족주의, 인종주의, 배타적 집단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1998년의 우승이 증명한 것은 프랑스민족(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개념은 허구다.)의 우월함이 아니라, 프랑스 사회의 공정함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이 지켜왔던 시스템성공했다는 믿음에 열광했던 것이다. 샹젤리제 거리를 점령한 수백만명의 인파는 프랑스에서는 매우 이색적인 광경이었다. 이러한 이상열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이었다.  

 

 

4.

  

영광의 날들은 당분간 계속됐다. 에메 자케에서 로저 르메르로 감독이 바뀐 후에도 전력은 변함이 없었다. 자국에서 개최된 유로 2000에서 프랑스는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우승했다. 2001 대륙간컵에서도 한국을 예선에서 5-0으로 대파하는 등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하며 우승했다.

 

이제 필드 위의 이주민들은 프랑스적 가치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문제는 이때부터. 레 블뢰 군단은 선수교체 시기를 놓쳐버렸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2000년 유럽 선수권에서의 프랑스 대표팀의 멤버들은 무려 18명이 2년 전 월드컵에 출장한 멤버들이었다. 대회가 개막되는 시점에서 A매치 출장횟수가 1자리 수인 선수들은 라메(2경기), 요안 미쿠(5경기) 등 2명뿐이었다. 결승에서 맞붙었던 이탈리아에는 A매치 1자리 출장 횟수인 선수들이 9명이나 있었으며, 고령화로 문제를 겪고 있는 독일에도 7명이나 있었다. 98년과 2000년의 우승을 위해서 프랑스는 젊은 선수들을 시험해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선수들은 늙었고 바뀌지 않는 멤버는 “타도 프랑스”를 외치는 다른 팀들에게 철저히 파악되었다.

 

그 결과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악재도 있었다. 월드컵 직전, 한국과의 평가전에서 지단은 ‘진공청소기’ 김남일을 만났다. 지단은 김남일에게 완전히 청소당하며 허벅지 부상까지 덤으로 선물 받았다. 후에 한국 기자들이 농반 진담 반으로 김남일에게 ‘지단이 치료비를 요구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그는 태연하게 답했다.

 

“내 월급에서 까라고 하세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단 없는 프랑스’의 허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지단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고정된 멤버의 정체가 불러일으킨 결과였다. 전 대회 우승에 빛나는 레 블뢰는 조별예선에서 한 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미지의 팀 세네갈에게 0-1로 패하는 굴욕을 당했다. 이 날은 세네갈 출신의 프랑스 대표팀 선수 비에라에게도 특별한 날이었다. 그는 경기를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혈통과 내가 세네갈에서 왔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조 추첨 이후 오직 한 가지 생각만 하신다. 그는 확실히 프랑스를 응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경기는 나에게 특별한 경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에라의 할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세네갈 사람들은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이었던 로이 킨도 한마디 거들었다.

 

“조국 세네갈을 배반한 채 프랑스 국가대표팀에서 뛴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시 비에라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라이벌인 아스날의 주장이었다. 한 마디 할 기회가 생겼는데, 로이 킨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어쨌든 ‘조국을 배신한’ 대가는 참혹했다. 그는 프랑스가 세네갈에게 0-1로 지면서 배신자뿐만 아니라 패배자까지 되어야 했다.

 

프랑스는 우루과이와의 2차전에서는 비겼다. 지난 경기에서 퇴장 당했던 앙리가 결장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치러야 했던 덴마크와의 마지막 조별 예선 3차전. 반드시 2점차 이상으로 이겨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부담은 더 컸다. 궁여지책으로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지단이 억지로 필드를 밟았으나 당연히 자신의 마법을 선보이지 못하면서, 오히려 덴마크에게 0-2으로 대파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세 경기에서 골대를 7번이나 맞췄지만 무득점에 그치는 지옥 같은 불운도 프랑스와 함께했다. 예선탈락이 결정된 후 지단이 동료들에게 한 말은 나름대로 명언이다.

 

“뒷문으로 슬그머니 나가자.”

 

포르투갈에서 열린 유로 2004 8강에서 잉글랜드를 만난 프랑스는 종료 직전 두 골을 폭발시킨 지단의 원맨쇼 끝에 멋진 2-1승리를 거둔다. 이것은 레 블뢰 부활의 신호탄이 될 수 있었지만 4강에서 만난 약체 그리스에게 0-1로 침몰당하고 만다. 그리스는 결국 대회에서 우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패배가 용서될 수는 없었다. 그리스는 이제는 구식 전술이 된 카테나치오를 들고 나왔다. 게다가 그리스가 구사한 그것은 카테나치오 중에서도 구식에 속하는 것이었다. 가장 현대적이고 세련된 축구를 지향하는 프랑스가 이런 팀에게 졌다는 것은 몰락, 혹은 침체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다.

 

 

5.

 

프랑스 축구는 침체해 있다. 그리고 98년과 2000년, 레 블뢰의 영광으로 입힌 똘레랑스의 금칠도 벗겨지기 시작했다. 2005년 10월 27일, 저소득층 거주지인 파리 북동쪽 외곽 마을 클리시 수 부아. 경찰의 검문을 피하던 15세와 17세의 외국계 소년 2명이 송전소 변압기에 감전사하면서 이주민 2세들의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프랑스 곳곳에서 자동차와 가게가 불타는 모습을 TV로 접한 세계인들은 프랑스식 사민주의라는 성(城)이 생각보다 허술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프랑스사회가 우경화되는 와중에 필드위의 이주민들은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해 2006년 월드컵에 출사표를 던졌다. 은퇴를 선언했던 노병들이 복귀했다. 지단도 다시 돌아왔다. 독일 현지 월드컵 공식 가이드북은 짧은 한마디로 이 사건을 표현했다.

 

“신이 돌아왔다.”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지만 너무 늙었다. ‘양로원’으로 불리며 국제적인 조롱을 당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유로 2004 이후 로저 르메르의의 후임으로 대표팀 감독이 된 레이몽 도메네크 감독도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도메네크는 세계적으로 통하는 감독이지만, 축구 이외에도 전문분야가 있으니 바로 점성술이었다. 그는 월드컵 엔트리에서 충분한 실력을 갖고 있는 로베르 피레와 미카엘 실베스트르를 제외했다. 도메네크의 놀라운 견해에 따르면 그들의 별자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피레는 전갈자리인데 이 별자리에는 포악한 성질을 지닌 선수가 대부분이다. 미드필더에 이러한 선수들이 2명씩이나 있으면 서로가 서로를 죽여 버린다. 사자자리인 실베스트르가 수비수에 들어가면, 스스로를 돋보이고 싶어 해 팀 전체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는 프랑스의 명문팀 올림피크 리옹을 인솔할 당시에도 7명의 전갈자리 선수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2명으로 감축시킨 경력이 있다. 다행히 은퇴했다가 돌아온 지단, 튀랑, 마케렐레 3인방은 모두 모두 전갈자리가 아니어서 함께 뛸 수 있었다. 도메네크는 당당히 선언했다.

 

“나의 팀은 23명이다. 그들의 별자리는 당연히 선발에 영향을 미친다.”

 

....
 

점성술사가 이끄는 대회 최고령 팀…. 역시나 조별예선 1차전에서 약체 스위스와 0-0으로 비기며 헤맸다. 한국과도 1-1로 비겼다. 그나마 대회 최약체로 평가된 토고를 2-0으로 물리치고 어렵사리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노장들의 굳은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막강한 전력으로 우승에 근접해 있던 스페인을 비에라, 리베리, 지단이 한 골씩을 터뜨리며 3-1로 대파한 것이다. 역시 우승후보였던 포르투갈도 1-0으로 이기며 준결승에 올랐다.

 

프랑스는 경기가 거듭될수록 예전의 조직력과 위력을 빠르게 되찾아갔다. 브라질과의 준결승전은 1998년 월드컵 결승전을 보는 것 같았다. 지단은 중원을 장악하며 브라질 선수들의 수비라인을 농락했고, 프랑스는 1-0의 승리를 거두었다. 경기 내용만 놓고 본다면 2-0, 3-0의 결과도 이상하지 않았다.

 

세대교체의 마지막 기회를 내던져버린 프랑스였지만, 늙은 대표팀의 고군분투는 감동적이었다. 우승에 성공했더라면 이 감동은 확실한 꽃을 피웠을 것이다. 정치적인 의미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프랑스는 결승전에서 상대팀 이탈리아의 집요한 신경전에 휘말려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승부차기에 들어가고 말았다. 특히 지단은 이탈리아의 마테라치에 시달리다가 참지 못하고 박치기로 그를 가격, 퇴장당하고 말았다. 이 공백이 컸다. 플레이는 프랑스가 더 훌륭했다. 하지만 축구에서 승부는 골로 결정된다.

 

사실 승부차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프랑스의 우승을 의심하는 축구팬은 드물었을 것이다. 그전까지 이탈리아는 승부차기에서 잘 된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승부차기는 심리적인 싸움이다. 승부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부담도 가중되고, 그러면 키커가 실수할 확률도 높아진다. 이날은 프랑스 선수들의 집착이 더 강했던 걸까. 승리는 이탈리아의 것이었다.

 

지단을 포함한 여럿 노장들에게 이 결승전은 생애 마지막 경기였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세리에 A의 승부조작 스캔들을 덮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레 블뢰의 목적은 적어도 그보다는 숭고했다. 그러나 졌다. 멋지게 그려지던 용 그림에 눈이 찍히지 못했다. 그 해, 프랑스 대선에서 신자유주의 우파 니콜라 사르코지가 당선되었다. 그러자 그의 당선을 반대하는 좌익 시위가 15개의 대도시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6.

 

사르코지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이민자들에게 적대적이었다. 그가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 국외로 추방되는 이주민들의 수가 빠르게 증가했다. 2007년, 프랑스의 이민 역사를 정리한 ‘파리 이민역사박물관’이 개관했다. 어느 모로 보나 대통령이 빠질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르코지는 의도적으로 불참했다. 이 행동을 두고 역사학자 파트리크 웨일은 말했다.

 

“프랑스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한 모욕이자 부인이다.”

 

‘공화국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걸 자랑스러워했던 프랑스다. 시민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자유, 평등, 박애가 프랑스의 정체성일까, 아니면 훨씬 오랜 옛날부터 있어온 ‘유럽 남서부 백인 문화’가 프랑스적인 것일까. 누구도 결론을 내릴 순 없다. 하지만 ‘똘레랑스’와 레 블뢰 군단이 같은 시기에 추락한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다.

 

어쨌든 한가지는 확실하다. 적어도 프랑스인들에게, 프랑스 대표팀은 프랑스 자체를 상징하며, 프랑스적 가치의 축소판이라는 것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16강 탈락이라는 '성적'을 놓고 난리를 피울 정도로 프랑스인들이 찌질하지는 않다. 문제는 그 과정이다.

 

레 블뢰는 1998년, 영광의 드라마를 일궈내면서 프랑스 사회와 체제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지금 홍역을 앓고 있는 것이다. 망신살 뻗친 거야, 그냥 쪽팔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프랑스 대표팀은 분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메네크 감독은 선수를, 선수는 감독을 비난했다. 선수들은 훈련 보이콧을 시도했으며 니콜라 아넬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차차 밝혀지겠지만) 도메네크와 틀어져 먼저 짐을 쌌다.

 

니콜라 아넬카
 

이는 사르코지 우파정권으로 대변되는 프랑스 사회의 분열과 무서운 데자부를 이룬다. 그 진짜 동기가 축구전술에 대한 불만이던, 선수기용의 문제이던 상관없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대표팀 선수단이 '프랑스적 가치의 몰락'을 경험하고 있는 프랑스의 거울이 되어버린 것, 이게 중요한 문제다. 12년 만에 레 블뢰는 프랑스의 전통적, 진보적 가치의 상징에서 모순과 분열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모순이 가중되고 있는 프랑스 사회는, 바로 그 모순의 심볼을 용서치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도메네크, 정말 잘못 걸린 거다. 특히나 마지막 경기에서 남아공 감독과의 악수를 거절한 것은 치명적이다. 프랑스인들에게 이는 도메네크 개인의 매너가 아니라 프랑스 자체의 매너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가의 얼굴에 똥물을 뿌렸다고 보는 거다.  

 

(그런데 프랑스 사회에서 우파, 신자유주의, 분열, 양극화를 상징하는 사르코지와 그의 부하들이 축구대표팀의 몰락으로 대변되는 '프랑스적 가치의 몰락'에 이렇게 성을 내고 있는 게 참 웃기지 않은가. 간단하다. 이는 우리 가카가 경찰서 고문수사 사건에 대해 '국민의 인권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며 사자후를 토해내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사르코지 대통령

 

정체성의 질이 좋지 못한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이번 일은 사르코지처럼 천박한 철학을 가진 지도자에게 자신이 프랑스의 '헌법애국주의자'임을, 즉 나 사실 꽤 멋진 정치인임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가만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7.

 

백인이지만 외국계인 미셸 플라티니는 이렇게 말했다.

 

“축구에 인종은 없다. 어설픈 백인들만 흑인을 차별한다.”

 

멋진 말이지만, 1998년에나 해당하는 말이다. 2006년에도 적용될 수 있겠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프랑스 축구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는 프랑스 사회의 위기와 맞물려있다. 레 블뢰는 진보적 가치를 배신하고 있는 사회에 대해 보이콧을 감행한 것일까?

 

레 블뢰의 눈앞에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다. 그 험한 여정의 결과는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체제가 낳은 적자'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그저 하나의 '스포츠 팀'이 되거나, 아니면 라 마르세예즈의 가사처럼 피 묻은 깃발을 올리거나.

 

 

extra

 

이 글의 내용 일부는 본 기자의 따끈따끈한 새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축구문화사를 쓰면서 인터넷 닉네임 'todayjust'에게 많은 도움과 감수를 받았다. 이 넘은 본인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한데, 이번 책을 함께 공저했다. 친구 자랑 좀 더 하자면 인터넷에서 제일 유명한 축구게임패치제작자이고 축구전문사이트(backtackle.com)를 운영하는 넘이다. 그러니까 무슨 책이냐 하면 바로 밑에 있는 저 책이다. 많이들 사시라. 복들 받으실게다.

 


 



본지의 축구전문기자이자 문화사전문 기자이기도 한 필독의 축구문화사가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책 제목은 '축구는 문화다'입니다.

 

출판된 책에는 본지에서 연재된 기사보다 더욱 풍부한 자료와 악랄한 글빨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월드컵 기간 동안 수고해준 필독기자에게 독자제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딴지편집장 너부리

 

 

딴지조기축구단장 필독
 
기사원문보기